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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빙기
    리뷰 2018. 1. 30. 16:44

    토요일 새벽 4시. 소변을 보고 물을 내렸는데 반응이 없다. 양변기 수조 통을 열어보니 안이 텅텅 비어있다. 세면대 수도를 틀어보니 물이 나오지 않는다. 주방도 나오지 않는다. 왤까...

    오전 내내 몇 시간째 기다려도 물이 나오지 않자 덜컥 수도관 동파 의심이 들었다. 얼마 전 옆 D동도 수도관이 동파돼서 이틀을 고생했었다는데...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일단 고양시 수도과에 전화해 봤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신호만 가고 받지 않는다. 고양시 민원센터에 전화를 걸어봤다. 다행히 상담사가 전화를 받았는데 먼저 계량기가 깨져 있지 않은지 확인해보고 멀쩡하면 드라이기로 녹여보고 그래도 안 되면 업자를 부르던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한다. 현재 거주지는 3세대가 사는 빌라인데 층별로 계량기가 있다. 일단 우리 층 계량기를 확인해보니 깨진 데 없이 멀쩡하여 드라이기를 좀 쐬어 봤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른 층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백날 드라이기를 쐬어봐야 소용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래층 301호 처자는 집에 없어 201호에 가서 확인해보니 역시나 물이 나오지 않는단다. 어찌해야 할지 답답하여 다시 민원실에 전화해서 혹시 수도과 직원이 없는지 물어봤더니 수도과 당직실 번호를 알려준다. 곧바로 당직실에 전화해 물이 안 나오는데 어찌하면 좋을지 하소연을 해봤다. 그랬더니 각 세대 계량기 말고 빌라로 들어오는 전체 계량기가 있을 거란다. 거길 먼저 확인해보고 그게 깨져있으면(동파) 거기까지는 고양시 수도과 책임이라 출동해서 수리를 해주는데 멀쩡하다면 일단 선생님(나, me)이 알아서 해야 한단다.

    빌라 밖으로 나와봤다. 바닥을 보니 이런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주물로 된 뚜껑으로 꽤 무거워 보이는 데다 저기 패여 있는 홈에 뭔가 걸릴만한 껀덕지가 없다. 별다른 도구가 없어 장도리로 여차여차해 보는데 소용이 없다. 몇 번 깨작거리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한 30분 동안 인터넷에 저 뚜껑 여는 법을 찾아보고 난리를 피우는데 그 와중에 똥까지 마렵기 시작한다. 집에서 쌌다가는 언제까지 그 똥을 보관할지 모르니 차를 몰고 삼송역까지 가서 급하게 큰일을 보고 왔다. 빨리 고치지 않으면 이 짓거리를 수시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 수도를 고치려면 일단 이놈을 열어서 계량기가 깨져있는지 어떤지 확인을 해서 수도과에 연락하든가 업자를 부르든가 할 텐데 저 쇳덩이가 내 앞길을 막고 있다. 뭐 그리 중요한 걸 숨겨놨다고 저런 무식한 쇳덩이로 막아둔 게냐. 포기하고 업자 부르려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해보자 하고 내려와서 발로 쳐보니 통통 소리가 나며 살짝 움직인다. 오잉? 맨홀 뚜껑처럼 엄청 무거워 보여서 쫄았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무거운 뚜껑이 아니었던 거다. 발로 살짝 눌러서 생긴 틈으로 장도리를 쑤셔 넣어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니 가뿐히 열렸다. 아주 가볍게. 뚜껑 전체가 한 2-3킬로 되려나? 으이구.

    그렇게 어렵게 맞이한 계량기란 놈. 일단 다행히 깨진 데는 없었다. 이 말은 더이상 수도과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것, 이제 오로지 업자를 부르던가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거다. 아까 상담원이 계량기를 좀 녹여보랬으니 일단 드라이어를 가지고 와 무작정 이 부위를 쐬어봤다. 

    캠핑용으로 산 릴선이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한 삼십 분 정도 쐬었나? 안에 스티로폼이 녹아 연기가 날 정도로 쐬었지만, 계량기 눈금은 움직이질 않는다. 지인 말로는 동파엔 뜨거운 물이 직빵이래서 커피포트로 그 비싼 삼다수 끓여다 부어봤지만 헛수고였다. 혹시나 집에 물이 나오는지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안 나온단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그제야 부랴부랴 업자를 찾기 시작했다. 일단 집주인에게 상황을 알리니 전에 D동 수도를 녹였던 업자 번호를 알려줬는데 연락해보니 요청이 많아서 이틀 뒤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동네 커뮤니티에서 업자를 수소문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봤지만 당장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 한파로 온 동네가 난리였다. 이제 우린 어쩌나... 그 와중에 집주인이 부동산을 통해 알아낸 한 업자가 한 시쯤 바로 올 수 있단다. 할렐루야!

    연신내에서 군데군데 녹슨 용달차를 몰고 온 연세 지긋하신 사장님께서 뭔가 듬직하게 생긴 물건을 차에서 꺼내 놓는다. 스팀 해빙기였다. 여기에 연결된 관을 수도관에 넣어 300도가 넘는 스팀(얼마나 강조하시던지!)으로 죄다 녹여버린다고. 그땐 그 듬직한 해빙기가 곧 수도관을 다 녹여서 몇 시간 내에 물이 콸콸콸 나올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긴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요게 바로 스팀 해빙기 : 사진 찾느라 네이버 검색해보니 현재 공구기기 쇼핑검색어 1위가 "스팀해빙기" ㅎㄷㄷ 전국이 난리구먼~]

    사흘 동안 수도관 때문에 생쇼를 하다 보니 수도학 박사가 된 느낌이다. 거짓말 아니고 해빙기만 있으면 나도 당장 작업을 할 수 있을 거다. 일단 빌라 수도관 구조를 살펴보자. 국가에서 제공하는 수도관이 동별로 하나씩 들어오고 이 수도관이 빌라 벽을 타고 올라가면서 201호, 301호, 401호 하나씩 가지가 쳐지는 구조다. 각 세대들 중 한 곳만 안 나온다면 그 집으로 들어가는 가지가 언 상태겠지만 우리 빌라는 전체가 안 나오는 상태이니 채소한 계량기부터 201호 사이 어딘가는 얼어있는 상태인 것이다. 채소한! 일단 순서는 거기부터 녹이고 나서 나머지도 확인을 해봐야 한다.

    [곧 뚫릴 줄로만 알았던 순간]

    먼저 201호 쪽에서 스팀 해빙기 선을 넣어 관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 수도관에서 나온 세대별 관은 구경이 작고 주 수도관으로 연결된 부위가 꺾여있어 해빙기 선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깊게 안 들어가니 당최 잘 녹질 않는다. 아무리 쐬어도 안 뚫려서 계량기 쪽에서 해빙기 선을 넣어보기로 했다.

    주 수도관은 구경이 넓어서 10M 정도 되는 해빙기선이 거의 다 들어갔다. 다 녹았다 싶어 수도관을 연결했지만 결국엔 실패. 날도 추운데 이 과정을 5시간 동안 몇 번을 반복했다. 초반에는 웃긴 얘기도 해주시고 손주 사진도 보여주며 자랑도 하시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는 줄고 혼잣말이 늘어나셨다. "괜히 시작했어~", "부동산에서 한 시간이면 끝날 집이라고 했는디~", "어우 씨팔꺼~"... 낮 한 시에 작업을 시작해 무도가 한창인 시간까지 장장 다섯시간을 넘게 사투를 벌이셨지만 결국 부랴부랴 짐을 챙기시더니 GG를 선언하셨다.

    [사투의 현장 : 벽에 매달린 게 아니다]

    일반 업자가 와서 실패했으니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에 D동 작업을 해서 이 빌라 구조를 잘 알고 있는 그 업자밖에 없다. 거긴 벽을 뚫어서 작업했다니 왠지 벽만 뚫으면 여기도 다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일이 얼마가 걸리던지 그분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연락해 봤더니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이삼일 걸릴 것 같다던 일정이 내일 12시에 당장 가능할 것 같다고 하신다. 할렐루야!

    다음날인 일요일 이른 시간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똥은 어떻게 싸고 있느냐고. 삼송역 가서 싼다고 했다. 지금 수돗물 받아서 가고 있는데 거의 다 왔으니 내려오란다. 어휴! 바로 앞에 친구네 집도 있고 필요하면 거기서 받으면 되는데 뭘 그걸 여까지 싸 들고 왔느냐고 툴툴대면서 내려가 낑낑대며 물통을 들고 올라왔다. 오시는 길에 일산에 유명한 닭칼국수를 4인분이나 포장해오셔서 느닷없는 부모님 사랑에 살짝 감동도. 아부지가 일단 와이프랑 애들은 일산으로 같이 가잔다. 가서 못한 빨래도 좀 하고 애들도 좀 씻기고 와이프도 씻고 하란다. 다 고치면 이따 저녁에 데리고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보니 좋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모두다 빠이빠이 하고 홀로 12시에 칼같이 도착한 업자를 맞이했다.

    두 번째 도전자는 해빙기를 먼저 꺼낸 게 아니라 대형 드릴을 먼저 꺼냈다. 벽이든 뭐든 부숴버리고 그 안에 얼어 있는 내장을 직접 녹여버리겠다는 마인드가 어찌나 듬직해 보이던지. 근데 벽을 두 군데나 뚫었지만, 수도관 탐색에 실패, 세 번째나 되어서야 수도관을 찾아낼 수 있었다. 뭐 내 집이 아니니 여기저기 뚫어대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집주인이 옆에 있었으면 속 좀 쓰렸을 듯. 그리고는 자기가 연락할 때까지 그냥 집에 올라가 계시란다. 듬직듬직~ 흐믓~.

    [이 구멍이 아닌게벼~]

    [찾았다 요놈!]

    집에 들어가 청소를 좀 하고 한참 있다가 내려와 보니 스팀 해동기를 돌리고 계셨다. 뭔가 잘 안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곤 스팀기를 돌려둔 채 갑자기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별달리 할 게 없어 다시 올라가 낮잠을 한숨 잤다. 한참 자다가 내려왔더니 1층 쪽에는 무슨 공기 압력기 같은 게 수도와 연결되어 있고 밖으로 나오니 외부에서는 스팀을 쏘고 있었다. 공기 압력으로 확인해보니 201호, 301호, 401호 세대 간에는 수도가 모두 뚫려 있는데 계량기에서 건물로 연결된 2층과 1층 사이 어딘가가 녹지 않고 있단다. 벽 내부에 꺾인 부분이 있는데 해빙기 선이 닿지 않아 그 부위가 잘 녹지 않는 것 같다고. 이렇게 스팀을 계속 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한다. 불현듯 이번에도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인다. 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어제 못 본 무도를 시청했다. 무도를 한참 보다 내려왔더니 아까와 똑같은 광경이었다. 아무리 스팀을 쏘고 지랄 발광을 해도 안 녹는단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기존 수도관은 얼어붙은 채로 그대로 내버려 두고 뚫린 벽의 수도관을 2층의 수도관과 외부로 연결하여 임시로 물을 쓸 수 있게 하는 방법. 그리고 봄이 오고 자연스레 영상의 기온을 되찾으면 기존의 관이 녹았을 테고 그때 원상복구 하는 방법. 최후의 방법이었다. 게다가 이 작업은 지금 당장은 힘들고 내일 오후 3시 정도에나 가능하단다. 참담했다. 오늘 저녁이면 피난간 식구들을 집으로 불러모아 한바탕 파티를 벌일까 했었는데. 그렇게 두 번째 기사님도 다음날 약속을 기약하고 보내드렸다. 장장 7시간 반의 사투였으나 결국 20mm 지름의 어딘지 모를 짧은 구간의 수도관속 얼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리 비용은 두 배도 넘게 불어나 버렸다. 다만 다행인 건 최후의 방법은 실패 확률이 Zero(0) 라는 것. 늦은 밤, 나 역시 부모님 집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월요일 수도관 연결을 위해 휴가까지 냈다. 하아~. 식구들을 데리고 오후 세 시쯤 부모님 집을 나와 네 시쯤 집에 도착했다. 기사님도 이제 막 도착하여 작업을 준비 중이셨다. 집으로 들어온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주방 수도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치지지직~푸슝슝~". 물이 한두 방울 나오더니 이내 쫄쫄쫄 나오고 금새 콸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물이 콸콸콸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는 아프리카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 이제 됐구나.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비굴한 듯 무릎을 꿇은 기사님의 뒷모습] 

    [이렇게 수도관을 외부로 연결하여]

    [얼어버린 구간을 버리고 2층으로 직결하였다]

    [살기 위해서 좀 흉하지만 봄이 올 때까지는 이렇게 살아야한다. 꼭 산소호흡기를 단 집 같구나...]

    [건물 내장이 외부로 이렇게 주렁주렁...]

    [빌라 정문은 당분간 강제로 잠금해제]

    [여기저기 임시방편 냄새가 폴폴~]

    장장 사흘간에 걸친 수도관과의 사투가 끝이 났다. 참 많은 것을 배운 경험이었다. 물의 소중함과 수도관의 구조, 수도 관리의 책임 소재, 수도관을 통한 세대 간 물의 흐름, 동파의 원인과 대비 방법, 수도 계량기 뚜껑 여는 법, 수도관 밸브 위치, 같은 수도를 쓰는 세 세대 간 수도 수리비 부담 시 한 사람이 배 째라고 나올 경우 소통의 어려움, 그러면서 생긴 집주인과의 정듦. 뭐든 경험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물이란 건 틀면 나오는 당연한 것인줄로만 알고 살았겠지.

    날이 상당히 춥다. 앞으로 더 추운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혹시 아직 동파를 경험해보지 못한 분이 계신다면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물을 똑똑똑 조금이라도 흘려 두시길 바란다. 그럼 이 모든 난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수십만원을 기껏해야 몇천원 밖에 안될 그 물 몇 리터로 아낄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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